2009년 06월 25일
"어떻게 시키는 것만 하냐!"와 가사분담
이것 역시 살짝 남자편 드는 포스팅 되겠다.
프로그래머라서 그런지, '일을 시키면 시킨 것만 한다' 패러다임에 아주 익숙하다. 아시다시피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컴퓨터에게 '이거이거를 해라'라고 시키는 거다. 그러면 컴퓨터는 내가 딱 시킨대로 한다. 명령 잘못 내리면 에러난다. 에러날 거 알고 지가 대강 알아서 고쳐서 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만약 그런 인공지능 컴퓨터가 진짜 나오는 날부터 IT 직종이 사라지는 거지.
신입보다 경력직에게 돈을 더 많이 주는 이유는, '하나하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신입보고 '이러이러한 프로그램 짜봐'라고 5분 설명한다면 당연히 제대로 못한다. 경력직이라면 알아듣고, 자기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되물어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비교를 하자면, 커피 한 잔 끓여오라고 시켰을 때 커피 포트와 커피 통, 커피잔 등등이 어디있는지를 물어본 다음에 바로 커피를 내올 수 있는 사람이랑, '커피를 어떻게 끓이는 거에요?' 하고 물어보는 수준차이라고 하겠다.
집안일은 귀한일이라 하면서도 의외로 그 복잡함은 과소평가 당한다. 아무리 사회 생활 오래 했어도 안 해 보면 모르는 거다. 집안에서 그렇게 교육 안 시키더나 따질려면, 나도 닌 고등교육 받았으면서 그 정도 컴터 지식도 없냐고 받아칠 수 있다. (물론 이건 이 나이 먹도록 색깔 다른 옷을 따로 돌려야 한다는 걸 모른 데에 대한 쩍팔림도 한몫 한다). 안 해보면 모른다. 그리고 모르는 일은 무조건 다 복잡해 보인다. 나도 영국 오기 전까지 나란 인간은 설거지 뒷정리 빨래 청소 평생 못하고 살 줄 알았다. 처음 할 때가 좀 어렵지, 해보다 보면 그리 까다롭지도 않고 요령도 생기는데 내 일로 생각하고 직접 맡아보기 전까지는 하여튼 어려워 보였다.
그런 나에게 집안일을 부탁한다면, 난 시키는 것을 최대한 잘 할 거다. 빨래 세탁기에 넣어라 하면 세탁기에 넣는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걸 꺼내서 널었다가 개어서 넣으라는 얘기였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 해야지. 해주고 싶은 마음에 했는데 니는 딱 시키는 것만 하고 그 정도도 모르냐 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솔직히 억울하다. 컴퓨터에 프로그램 깔라고 해서 깔았는데, 그게 바이러스 걸렸는지 확인도 안하고 했냐, 아예 손 안대는게 돕는 거다, 넌 어떻게 그런 기본도 모르냐는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본다면 다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을 거 아닌가.
"자기가 알아서 맡아서 왜 못하지"와 "시키는 것만 한다"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 있는데, 상대방이 주인의식을 가지기 원하면서도 그럴 기회는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소를 시켰는가? 그럼 자기가 맡아서 하도록 두면 된다. 아무리 더러워도 그냥 둔다. 설거지를 시켰는가? 난 설거지를 안하고 그냥 두면 곰팡이가 생겨서 엄청 불결해지고, 씻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아도 그게 설거지 바로라는 행동으로는 연결이 안 되다가 최근에야 바뀌었다. 그러니까 '내'가 안 한 '행동'에 대한 댓가가 보일 때까지 그냥 두는 것이 주인의식 만들어주는 방법이지, 옆에서 주인의식 가져라고 잔소리 해봤자 안 통한다. 빨래 시켰는데 안 하면, 그냥 내 빨래만 해서 입고 두면 된다. 출근하기 전에 입을 옷 없어서 몇 번 허둥지둥 하다 보면 (나 같은 경우는 한 스무번 정도 -_-), 다음부터는 빨래가 얼마나 밀렸는지에 눈이 저절로 간다. 설거지도 아무리 미뤄봐야 결국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먹고 나서 바로바로 씻는다. 이렇게 되는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 주인의식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없다. (몇 년이라는 데에 기함하실 분들 있겠으나, 공부하면 삶이 쉬워진다는 거 알면서도 하기 힘들듯이, 지금 설거지 하면 내일이 편하다는 것 역시 오랫동안 겪어봐야 알게 되더라. 내가 좀 학습능력이 심하게 느린 건진 몰라도. 청소는 메이드 데리고 살다 보니 15년 걸려서야 이해했다.)
다음 문제는, '아무리 해도 마음에 안 들어한다'. 청소를 하라 했는데 그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거 가지고는 뭐라 하지 말자. 치우랬더니 가구 위의 먼지가 뽀얗게 앉은 건 청소 안 했는가? 이건 보이지도 않느냐는 비아냥이나 추궁보다는, 다음부터는 그것도 치워달라고 하고, 그 부탁을 열 번 정도 해도 안 듣는다면 언성 높여도 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글은 나를 기준으로 쓰다 보니까 좀 심하다. 그래도 이제 그럭저럭 인간 되었으니 봐주시라.) 상대방은 빨래를 대강대강 개어서 넣어버리는데 나는 반듯하게 개는게 좋다 하면, 내가 개던가, 다르게 개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물론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해주기를 바라는 거니까 협상이 필요하겠고, 버릇이 되기까지는 열 번 이상 부탁해야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인간형은.
1) 가사일은 '돕는다'고 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일부러 다른 사람이 할 때까지 미루고 있는 인간. 집안일은 여자가! 라고 생각하는 인간. 간단한 거 하면서도 생색내고, 내가 할 일 아닌데 해 준다는 생각하는 인간.
2) 다음부터 안 시키도록 일부러 일 못하는 인간.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인간.
이 둘은 그냥 폐기처분하는 쪽이 낫겠다. 그러나 최소한 양심이란 거 있고, 분담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1) 시키면 하는 것은 임무수행 100% 이다. 칭찬해 주자.
2) 시킬 때 확실하게 지시하지 않은 사항 (설거지를 한 후에 싱크대를 닦으라던지, 청소기를 돌린 후에 제자리에 넣어두라던지, 빨래를 갠 후에 넣어두라던지) 을 실행하지 않은 것에는 신경질 내지 말자. 말 안해도 알아서 척척 할 거 같으면 인수인계가 왜 필요하며 교육이 왜 필요하겠는가.
3) 한 번 하라고 맡겼으면 자꾸 재촉하지 말고 그냥 두자. 청소 두 달 안한다고 죽기야 하겠나 (...). 설거지 밀렸으면 밥 안 하면 된다. 빨래 밀렸으면 내 것만 빨아 입으면 된다.
4) 한 번에 갑자기 부대사항을 마구마구 더하지 말고, 시킬 때마다 조금씩조금씩 더하자. 게임을 해도 갑자기 레벨 올리면 재미 없다. 이것저것 한꺼번에 시키면 아예 하기가 싫어진다.
5) 나도 그렇고, 그 외에 집안일 잘 못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골탕먹이려고 못하는 거 아닌 경우라면 약간의 이해를 ㅜㅜ
6) ...나 요즘엔 좀 많이 나아졌다 ;ㅁ; 자기합리화자기합리화.
# by | 2009/06/25 22:08 | Essays | 트랙백(1)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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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둔탱족에게 뭔가를 시킬 때의 유의사항
"어떻게 시키는 것만 하냐!"와 가사분담 (양파님 블로그 링크)살짝 남자편 드는 포스팅이라고 하셨지만, 남녀 관계없이 좀 둔한 사람들 전반에 걸친 해당사항인 듯.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초 둔탱 눈치없음 + 게으름의 화신인 누군가로써는 상당히 공감가는 내용.누군가는 아직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는데 그다지 집안 살림에 손을 대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최소한의 수준만 - 먹은 그릇 설겆이라거나 걸어가다 뭔가를 밟아서 다칠 위험을 피......more
어머님이 가끔 시키시는데 저도 시킨 것만 하는 스타일이라..
'말 안 해도 눈치껏 이런 건 다 해야지!'하시면 '아니 말 안 하면 내가 어케 알아-_-'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더라고요......ㅠ.........
rumic71// 홧팅 >.<!
하지만 안 시켜도 잘 하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더 인기가 많을 것은 당연지사... orz
그렇지만 이 글을 신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장님께 보여드리고 싶군요. 흑흑ㅠㅠ
긍정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서 보기가 좋습니다 :)
'내 일이다' 라고 인식하는 거랑 아닌 거..
군대에서두 이쁨받는 신병들은 나서서 일 열심히 해주는 애들인거랑 마찬가지 이치[...]
아무래도 이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래저래 마음씀씀이가 달라지더라구요 ㅎ
시키는것도 제대로 안하던지... 너무 구박해서 사이 안좋아졌어요 ㅠ.ㅠ
하지만 시키는대로도 안한단 말이에요...
그나저나 저 언제 회먹으러 가나요 흑흑
제가 워낙 좀 지저분하고, 일 배우는 거 늦고 해서 ㅜㅜ 웬만한 한국 남자분들보다 제가 훨씬 더 강적일 거에요. 그래도 교육 가능했으니까 희망을!!
이정도는 다들 이해하고 감내하지 않나요? -_-;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인간형' 과만 싸우는 여자입니다........... ㅠㅠ
어느 정도 협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야 개조 가능한데 말이죠 ㅡㅜ
그리고 아낌없는 칭찬이 중요하죠~!!! ㅎㅎ
(지금 자취 10년차 살림녀가
긴 인생 부모님 슬하에서 산 예랑때문에
걱정이 좀 됩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