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29일
프로그래머들의 미학 + 연애
공대 남자아이, 문대 여자아이, 그리고 어떤 대화
공대, 학부에선 답이 하나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IT 직장에서 일하면서 한 문제에 대한 답은 참 여러가지가 있다는 거 매일처럼 배우게 된다.
프로그래밍 알고리듬이나 ERP implementation 이나, 아니면 간단한 스크립트라도, 분명히 '우아함'은 존재한다. 코드 레이아웃이 우아한 파이썬이 있고, 코드 자체는 아주 지저분해도 프로그래머만 논리정연하다면 그것이 절절히 드러나는 펄이 있고, 한자 성어 따위는 절대로 못 쫓아오는, 절대절명 미학의 정규식이 있다 (...).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인테리어 디자인의 잡지에 나오는 가정집처럼 인프라가 아름답게 구축되어 있는 IT 시스템이 있고, 그런 곳에 익숙해진 이는 열라 드럽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보고 운다. 비 프로그래머들에겐 다 똑같이 보일지 몰라도 프로그래머들 사이에는 '간결하고 논리정연, 깔끔하게 쓰여진 코드'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언어나 문화의 장벽 따위는 아주 가볍게 뛰어넘는 그런 동질성이 있다.
나도 나름 문과 출신이면서 이런 소리하면 문과애들한테 얻어 맞는데 -_;; 적어도 내 주위의 IT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문과보다는 '목표'가 훨씬 더 확실하고, 그에 대한 접근은 효율성과 논리성으로 판단받으므로 좀 더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아주 효율있고 논리정연한 '답' (답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 사실 이래서 코딩하기 힘들다. 코딩 하면서도 '훨씬 더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줄일 수 있을텐데' 생각이 늘 든다. 그럭저럭 날씬하다고는 해도 비키니 입고 나가려니까 여기 저기 군살이 신경쓰이는 아가씨처럼, 누구에게 보여주려면 쑥스럽다. 데드라인 때문에 마구마구 코딩 해나갈 때는 꼭 내가 입에 풀칠하느라 속기사 알바일 맡은 한석봉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다들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가하는지 모른다. 돈이라는 압력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잘 쓴 코드 보여주고 싶지 않을까?
공대생들이 만점자리 답안지를 보여달라는 건 완벽한 답을 보여달라는 것보다 이런게 아닐까 싶다. '교수님이 보기에 이 답에 대한 최고 (제일 짧고, 제일 논리적이며, 제일 단순하면서도 완전한) 답변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교수가 제시하면 학생들은 서로 보고 비교하고 납득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이공계생들에겐 '납득'이 중요하다. 그냥 교수 지 맘대로 100점 만점에 70점이라면 그거 참 난감하다. 교수가 '내가 가르치는 이 과목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데 그 커리큘럼 내에서 낸 이 문제는 이러저러하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라고 본다'라고 하면, 그에 비해 내 답이 얼마나 빗나갔는지 비교해보고 납득이 가능하고, 납득 안 된다면 교수에게 '제 답은 이러저러한 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더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따질 수도 있겠다. (뭐, 나라면 그러겠다.) 그 사람이 원하는 '지식 시스템'을 이해 해야 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내놓을 텐데, 그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지식 시스템'을 내놓지 않고 그냥 점수 매기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연애 얘기로 돌아와서.
여자가 뭔가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한다. 이럴 때 남자는 교수에게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납득시켜주기'를 요구한다. 내 감정은 이러저러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네가 이래저래 하면 난 이러저러한 기분이 들어 등등. 그러면 남자는 이해를 하고 그 공식을 입력시킨다. 아, 내가 전화를 안 하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렇다면 목표는 전화를 함으로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 이 때 필요이상 전화를 많이 하면 그건 비효율적이다. 하루에 네 번의 전화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루에 여덟번 전화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사랑하면 어차피 더 많이 할 거라는 말은 시비로 들린다.) 그러므로 남자는 하루에 네 번 전화를 한다.
그런데 여자는 그걸 그렇게 재듯이 하는 남자의 행동에, '삐지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섭섭하다. 그러나 남자 입장에서 이건 scope creep 이다. 분명히 처음에 원하는 건 '전화를 함으로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걸 받아들여서 전화 하기로 한 것 (해결책) 이 마음에 안 든단다. 더 자연스럽게 하란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는 원래 스펙에 없었잖아. 신경질 나지만 오케.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것도 받아들인다. '자연스럽게'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전화하던 것을 랜덤화 한다 (...) 횟수도 error margin 을 좀 늘려 다섯번으로 한다.
그러나 여자 쪽에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녀가 원했던 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매일 보고 싶어서 전화 해주었으면'이다. 남자는 '난 일 하는 도중에 전화하는 것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면 네가 섭섭하다니까 섭섭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고. 요구조건을 다 맞추는 해결방법 (랜덤한 시간에 전화 다섯번)을 제시했음에도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남자는 화가 난다. 시험문제에 백점짜리 답안지 냈는데 교수가 답을 보고 시험 문제를 바꾸고 50점 까는, 혹은 계약서야 도장찍고 나서 딴소리 하는, 뭐 그런 아주 불공평한 시추에이션으로 보인다.
(물론 이공계쪽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ㅎㅎㅎ 나 역시 공순이라 해도 신랑이 전화 안 하면 섭섭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냥 요점만 정리하자면.
1. 이공계라고 '답 하나'를 믿는 건 아니다. 문과쪽에서 보면 단순무식스러울지 모르나 사실 이공계에서 보기에 문과는 정확한 문제제시와 아름다운 해결책 제시가 없는, 시간소모적인 토론만 우글우글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2. 프로그래머들에게도 미학이 있다. 아름다운 코드를 보면 경외심과 열등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문학의 언어 유희, 음악의 선율, 유화의 색감과 붓터치에 감동하듯이 논리 정연함이나 무자비할 정도의 효율성, 딱 떨어지는 해결책은 그 만으로도 아름답다.
3. .........역시 연애에는 꽝이다 ㅋㅋㅋ 그래도 신랑감으로는 괜찮다고 난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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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얘기로 돌아와서.
여자가 뭔가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한다. 이럴 때 남자는 교수에게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납득시켜주기'를 요구한다. 내 감정은 이러저러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네가 이래저래 하면 난 이러저러한 기분이 들어 등등. 그러면 남자는 이해를 하고 그 공식을 입력시킨다. 아, 내가 전화를 안 하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렇다면 목표는 전화를 함으로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 이 때 필요이상 전화를 많이 하면 그건 비효율적이다. 하루에 네 번의 전화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루에 여덟번 전화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사랑하면 어차피 더 많이 할 거라는 말은 시비로 들린다.) 그러므로 남자는 하루에 네 번 전화를 한다.
그런데 여자는 그걸 그렇게 재듯이 하는 남자의 행동에, '삐지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섭섭하다. 그러나 남자 입장에서 이건 scope creep 이다. 분명히 처음에 원하는 건 '전화를 함으로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걸 받아들여서 전화 하기로 한 것 (해결책) 이 마음에 안 든단다. 더 자연스럽게 하란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는 원래 스펙에 없었잖아. 신경질 나지만 오케.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것도 받아들인다. '자연스럽게'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전화하던 것을 랜덤화 한다 (...) 횟수도 error margin 을 좀 늘려 다섯번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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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공계쪽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ㅎㅎㅎ 나 역시 공순이라 해도 신랑이 전화 안 하면 섭섭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냥 요점만 정리하자면.
1. 이공계라고 '답 하나'를 믿는 건 아니다. 문과쪽에서 보면 단순무식스러울지 모르나 사실 이공계에서 보기에 문과는 정확한 문제제시와 아름다운 해결책 제시가 없는, 시간소모적인 토론만 우글우글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2. 프로그래머들에게도 미학이 있다. 아름다운 코드를 보면 경외심과 열등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문학의 언어 유희, 음악의 선율, 유화의 색감과 붓터치에 감동하듯이 논리 정연함이나 무자비할 정도의 효율성, 딱 떨어지는 해결책은 그 만으로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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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7/29 18:24 | work - IT | 트랙백(8) | 핑백(10) | 덧글(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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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는 "그런거 억지로 시켜봐야 다 소용없다, 그냥 시키니까 의무적으로 하는거지."
라는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셨답니다....
국어를 공식에 대입해서 풀거나 하긴 무리니까요
^0^)/
사실 연애하면서 가장 힘든게 그거죠-;;;
아 공감의 쓰나미가 밀려오네요. orz
아니 만점짜리 답은 당연히 보여줘야 하는거 아닌가...ㄱ-)...
저 전화 시츄에이션에서도 남자 쪽 행동패턴하고 비슷하고...;;
아, 아름다운 코드, 진짜 ㅠ_ㅠ 제가 그래서 코딩하기 싫어요. 제 코드 보고있으면 성질나요. -_-;
정말 공감합니다 ㅠ_ㅠ
저도 지나가는사람님처럼 같은 직종/같은 여자임에도 남자쪽 행동과 똑같습니다. 이제서야 왜 제 여동생이 저에게 그렇게 밑도 끝도 없고 이유도 알 수 없는 신경질을 냈는지 알겠습니다.
밑의 코드는..... c를 첨 배우던 시절, 막 알고리즘이 어떤건지 막 깨우칠 무렵 용자급 알고리즘을 풀다 반쯤 넋이 나가 선생님을 붙잡아세워놓고 제가 이렇게 무지막지한걸 해야됩니까라고 따지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 그 알고리즘은 풀면 풀수록 뒤에서 막 후방이 비치더란 말입니다.
컴퓨터는 왜 배워가지고..(..;ㅅ; 할수없잖아.. 그게 늄의 천직인데..)
공대를 갔어야 했어...! (수학의 벽이 ㅠㅠ)
.....이곳에서 아름다웠을 코드가, 저곳에서는 아름답지 않을수 있다는 것이 아쉽군요.
네,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완결적인 소스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요.
(프로그래밍 한정, 입니다.)
다만 효율... 이 부분에서 비 공대생들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저희 커플은 반대에요. 정말 비슷한 상황이 남-녀만 뒤바뀌어서 일어났네요.
완전 문과이건만;; 연애의 패턴인가 봅니다.
다른 사람의 소스는 아름다운데 내 소스는 어지러운.
그래서 관뒀습니다. 약간은 후회되지만
ps. 혹시 RSS전문 공개 하실 의향은 없으신지. 리더에서 매번 브라우저 열기가 뭐해서
p.s./ 오시기 귀찮으신 거죠? 흑. 미워요. -_;
(사실 저도 전문공개하는 블로그 더 좋아하는데 자기 블로그는 부분공개만 한다는 ㅋㅋ)
글치만 연애 귀찮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반갑습니다 :)
저도 신랑감으로는 괜찮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뜯고 개선하고 업그레이드 되는거.....
본능적으로 땡겨요 ㅠㅠ....ㅎㅎㅎ
(가끔 저같이 걸쳐져 있는 사람도 있어요)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문계는 원문의 리플에서 말하듯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덕부에 그 근거까지 다 끌어올), 과정중시.
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여튼 전화비유 저도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학년때 교양으로 들으러 갔던 역사학과 전공수업의 강사님 말씀 : 이 수업 들으러 오신 공대생분들 계시는데, 시험 답안지에 절대 번호 붙이지 말고 표나 그래프는 필요없으니 절대 넣지 마세요. (저를 포함 공대생들은 문화 쇼크 받았어요.;)
...음. 공부 나름 열심히 했었는데 역사학과 수업은 B0을 넘은적이 없었어요.;;;;; 1시간동안 답안지 앞뒤로 5장씩 쓰는 문대생들이 참 대단해보였다는.;
그런데 호..혹시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요하네스버그이신것도 그렇고 공과계열이신것도 그렇고...
혹시 윈터, 요하네스버그 라는 소설쓰신 분이신가 하는 의문이 들어 수줍게 리플 남겨봅니다.
이 글이야말로 잘 짜여진 소스같은 뭔가 후광이 보입니다!
글 보고 미친듯이 웃다가 갑니다. ㅎ
정말 혼자 야밤에 박수치면서 웃다가 한글자 남기고 갑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