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는 만들어지는가

드디어 신입사원 R 을 잘랐다. 어제 뽀스 브렛씨와 이야기 하더니 사무실을 나와서 가방 챙겨들고 확 나가버리더라. 인사 없이.

두 달 데리고 어떻게든 가르쳐 보려 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지난 두 달 동안 그 아이 데리고 있으면서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프로그래머들의 공통점이라면 귀차니즘과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 그리고 귀차니즘 때문에 이상하게 일을 더 만드는 것 정도.

예를 들어 좀 지루한 수작업을 세 번 해야 한다 치자. 정신 집중해서 얼렁 빨리 하면 두 시간만에 끝낼 일이라도 정말 프로그래머라면 네 시간을 들여서 스크립트를 쓴다. (한 시간 정도 비슷한 프로그램 있나 다운로드하는데 쓸 수도 있고 다른 언어나 다른 라이브러리 써서 새로 쓸 수도 있겠다. 시간 낭비의 가능성은 거의 무궁무진하다). 네 시간을 들였으니까 시간은 더 든건데 프로그래머라면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앞으로 또 그런 일 하게 되면 프로그램만 돌리면 된다' 라고 생각하고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일 만들기 좋아하는 프로그래머라면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요구사항이 있을지 모르니까 툴이랑 라이브러리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패턴 찾기'이다. 비슷한 수작업을 어떻게 자동화할 것인지 요소를 분석하고 똑같은 패턴은 룹으로 돌리고 사람이 하면 오래 걸리지만 기계로 하면 빠를 수 있는 (텍스트 분석 같은) 부분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면 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닌가보다. '해야 할 일'을 알고리듬으로 분석하는 것, '적성'이 필요한듯.

R 의 생일이 그저께였는데 마음이 참 안 좋았다. 그렇지만 적성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노력까지 모자라면 안 되는 거잖아. '일하고 싶다'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딴 곳에 번듯하게 취직해서, 나중에 '니네들은 나 잘랐지만 난 이렇게 성공했다' 라고 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R, 행운을 빈다.

by onion | 2007/03/28 17:56 | work - IT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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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rt.oriented at 2007/03/29 16:04

제목 : 프로그래머 6개월 탄생론
예전 회사에서 일 할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프로그래머 뭐~ 6개월만 학원에서 공부하면 할 수 있는 거야. 그 자리에서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프로그래머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IMF 직후 급증한 청년 실업을 해소하고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있는데, 바로 IT 인력 몇 만 명 양성 프로젝트였다. 정규 학과 과정이 아닌 속성 학원에서 6개월 정도 첨단 IT 기술을 교육 뒤, 산업 현장에 배치하......more

Linked at 새퍼 양파의 런던 일기 : .. at 2009/03/09 19:58

... 당신이 프로그래머라면 딴짓과 삽질과 게으름은 이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그 중에 제일은 게으름이라. 여기서도 썼는데. 1. 할 일이 있다. 두 시간이면 끝난다. 2. 당신이 진실한 프로그래머라면 그냥 바로 한 번 하고 끝내지 않는다. (=> 게으름) 3. 이 하기 싫은 일을 ... more

Commented by 마르슬랭 at 2007/03/28 18:29
마음이 안 좋겠소, 하지만 재능도 없고 앞으로 발전 할 가능성 별로 없는 분야에 시간 투자하는 것, 그 사람에게도 매우 낭비일거야. 모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마지막 두 줄, R이란 사람도 같은 생각 했으면 좋겠다.
Commented by oO천랑Oo at 2007/03/28 19:25
일하고 싶다는 관심은 있는건 아닐까요?...그래도 적성과 노력이 없는 것 같군요..R이란 분은요..^^
Commented by 가이우스 at 2007/03/28 22:05
뭐를 하든 근성을 가지고 꾸준히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프로그래머는 끈기를 가지고 해야죠
Commented by onion at 2007/03/28 23:38
마르슬랭// 응. 잘 안 되니까 더 노력 안 하게 되고, 그렇지만 퇴사하기는 싫고, 좀 그랬나봐.
천랑// '직장'을 원했던 것 같아요. 출근 늦고 퇴근 빠르고 (사실 일곱 시간도 안 지킨 날이 많아서 ㅡㅡ) 적성도 없는데다 노력이 없으니 실력이 늘 리가 없지요.
가이우스// 근성을 가지고 꾸준히 했다면 적성 없는 건 커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노력 부족까지 더해지니까 ㅠㅠ
Commented by object at 2007/03/29 16:01
프로그래머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프로그래머는 저임금 직종이라는 이야기를 합리화시키는 셈입니다. 굳이 프로그래머에게 필요한 것이라고하면 적당한 잔머리가 아닐까요 :)
Commented by onion at 2007/03/29 17:20
object// 제 생각에는 프로그래머들의 보통 성격 때문에 더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없는 자부심이나 전체주의적인 이기심 (우리는 다 잘난 거야 등등) 이 모자라다 보니까 '우리 하는 거는 관심하고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도 할 수 있다' 라고 믿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하는 일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의사나 변호사들처럼 자부심을 가진다면 인식도 나아지지 않을까요.
말씀하신대로 잔머리 말이죠 ;)
Commented by adnoctum at 2008/07/30 23:36
저도 엊그제, 면접까지는 아니고, 박사과정 들어올 아이와 잠깐 얘기해 봤는데, 코딩 좋아하냐니까 코딩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반문하더군요. 사실 그 때부터 좀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잘 모르시는 지도교수님조차 그 학생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더라구요. ICU 학생이었는데도... 프로그래밍은 정말, 머리 좋고 나쁜 거 떠나서 적성 같다는 거, 참 여러 번 느낍니다. 11시에 집에 가면서, '안녕'한 사람이 다음 날 아침에 와서, '헉, 어제랑 똑같은 자세네.'라며 놀라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니터 앞에 붙어있을만한 깜냥은 필요하겠죠. 제 친구 녀석 한 놈도 PCA 구현한다고 며칠 인터넷 뒤지고 루비로 했다가 느리다고 C로 바꾸면서 또 며칠 밤 새더군요. 언젠가 한번은 같이 밤새는데, 혼자 "아..씨...nan. nan. 왜 자꾸 나오는 거야."(이거, 억양이 되게 중요한데) 하며 nan 때문에 죽을려고 하던데,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쟈니, 역시 전산, 특히 프로그래밍은 적성이다, 란 생각이 팍 들더라는...
Commented by 양파 at 2008/07/31 16:27
맞아요. 그건 정말 적성이에요. 어느 정도의 능력도 필요하긴 하지만 성공적인 프로그래머가 되려면 적성이 80% 죠.
Commented by keedi at 2009/03/17 18:10
꼭 전산학을 전공하지 않고 머리가 좋지 않더라도, 근성과 꼼꼼함, 우직함, 체력(?)만 있으면 누구나 다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그래머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또 지내보니까 그런 후천적 자질을 아무나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런 의미에서는 또 프로그래머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것 같긴 합니다. :)
Commented by 양파 at 2009/04/15 18:38
캭. 늦은 댓글 ㅠ.ㅠ;

네 요즘 생각하기에 프로그래머는 '배운 것'보다, 성격상의 적성이 더 필요하다고 봐요. 배우는 건 적성이 되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서 배울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Commented by 김정일 at 2009/04/15 01:40
이 블로그 와서 많이 놀랬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철학과 출신입니다만, 일 하는 방식은 완전 프로그래머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MBA 지원자인데, 이글루스에 검색하다가 에세이 내용 건질 거 없나 하고 왔는데, 전혀 다른 쪽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가네요. 고깃집에서 시원한 냉면 먹게 된 기분이랄까..
저도 양파님 팬 할테니, 블로깅 계속 해주세요. ^^
Commented by 양파 at 2009/04/15 18:39
^^)/ 방갑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인문과 출신이 꽤 많아요. 철학과 출신도 있고요. IT 쪽은 어느 정도 적성만 있으면 가능한 것 같아요. 대신에 아무리 전공하고 했더라도 적성이 안 맞으면 오래 못 버티더군요 =)
흑흑. 저도 MBA 할까 했는데 비싸기도 하고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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